보랏빛 추억, 깽깽이풀

Photography/Essay
 2024. 11. 17.  설마 



보랏빛 추억

1983년 3월, 의성군 안계면의 삼성중학교 1학년에 진학한 나는 일주일만에 이 학교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채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2023. 충남 금산, 깽깽이풀

 
국어공책에 영어알파벳이 한 글자라도 인쇄되어 있으면 "도대체 국어공책에 영어가 웬말이냐"라며 밀걸레자루 몽둥이로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를 졸업한 지 몇일 지나지도 않은 여린 아이들의 허벅지에 피멍이 들도록 때리는 싸이코패스 민족주의자 국어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첫 국어 수업 시간, 반 아이들의 공책을 앞 줄부터 검사하며, 교실 안을 가득 채우던 몽둥이가 허벅지에 내려 꽂히는 채벌 소리와 함께 차례차례 순서가 다가오는 공포에 떨던 그 순간, 수업종료종이 울리자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조지겠습니다"

라며 게슴츠레한 눈매와 함께 정중한 말투로 지긋이 내뱉던 그 선생을 '싸이코패스' 말고 다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그 선생은 잘 정년퇴임을 했을까? 아니, 그건 관심없고 그 보다 그 악마같은 선생에게 수업을 들어야 했던 그 불쌍한 친구들은 어떻게 됐을까?
그런 걱정을 뒤로 한 채 다행히 토요일이었던 그 날 수업을 끝으로, 일주일만에 안동에 있는 시골 마을로 전학을 가며 그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다.


ⓒ2023. 충남 금산, 깽깽이풀

 
새로 전학 간 중학교는 시골 벽지였고, 그 동네엔 수도시설이  100% 보급되지 않은 곳이라 그때까지도 S자 손잡이가 달린 쇳덩어리 수동펌프로 물을 긷는 집도 더러 있을 정도의 그런 시골이었다.
이 동네는 서점은 커녕 시내까지 갈려면 주말에 하루에 몇 대 안되는 버스를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1시간은 족히 멀미를 참으며 타고 나가서야 전자오락실이나 서점 구경이라도 할 수 있었고, 레코드가게에 들러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기덕DJ와 이종환DJ의 프로그램에서 흘러나오는 최신팝송을 인기 라디오 채널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DJ의 멘트를 피해 녹음하기 위한 용도로 공테이프를 몇 개씩 사오던 그런 동네에서 살게 되었다.


ⓒ2023. 충남 금산, 깽깽이풀


어릴 적 부터, 아버지의 직업(중등교사) 박봉 특성 상 형편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는지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같은 동네에서도 1년에 한번씩은 이사를 다녔고, 평균적으로 3년 마다 아예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며 전학을 가야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좀 친해질라 치면 하루 전이나 심지어 당일 날 전학 간다는 말을 부모님이 아닌, 담임선생님이

"야, 박OO! 가방 챙겨! 전학간다."

난데없는 통보를 듣고 갑자기 전학을 가는 경우도 있어서 초등학교시절은 지금 연락되는 친구들도 없고, 친했던 친구들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아예 없다.

 


 
그 시절은 TV에선 재미있는 만화들이 엄청 많긴 했지만, 양질의 프로그램들이 부족했으니 자연스레 책으로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을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 때 마다 방학이 시작되며 학기 전에 받는 새 학년 교과서들 중에 국어교과서는 유일한 책이었다.
선생님 집에 책이 이렇게 없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우리집엔 아버지가 결혼하며 가져 오신 아주 어려운 한자 제목이 적힌 양장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 기억 나는 건 <중용>이란 책이었는데 한자가 너무 많이 들어있어서 내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후속 이야기에서 나올 내용이지만, 아버지께서 중고책방에서 사다주신 전세계동화전집이 있긴 했다. 그 책들이 우리집 유일한 읽을거리였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중학교 시절 가끔 학교 앞에는 위인전집을 판매하는 책판매상이 찾아오는 날이면, 방과 후에 전자시계가 내장된 신기한 볼펜같은 사은품으로 아이들을 유혹하며 집에 가서 내일 엄마아빠에게 책사달라고 졸라보라는 꼬드김에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가 위인전집, 동화전집 세트를 사달라고 매번 졸라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그렇게 파는 책은 좋지 않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축당하기 일쑤였다.
하긴, 그 당시 시골 교사의 월급이 뻔했을테니 20만원 가까이 되는 그 비싼 책들을 사줄거라는 큰 기대감은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초등학교 시절, 반에서 1등하는 친구나 반장집에 놀러가면 어김없이 그 친구들 집엔 벽을 가득 채운 책3단,4단 책꽂이에는 내가 그렇게 갖고 싶었던 각종 위인전집과 동화전집들이 있었고, 어머니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을 때 나는, 그 재미있는 책들을 읽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거기엔 이순신, 김유신, 을지문덕, 강감찬, 세종대왕,광개토대왕, 신사임당, 오성과한음,... 등의 위인들의 흥미진진한 성장기와 활약상들도 재미있었지만, 전래동화전집에 나오는 신기한 동화나 이솝이야기, 그림형제들의 그림동화는 물론, 전세계 동화들 속에 신데렐라, 백설공주, 라푼젤, 늑대와 일곱마리 양, 양치기소년, 피노키오, 피터팬,... 그야말로 정말 상상 속의 이야기들이 아니라 마치, 눈 앞에서 본 듯 하게 묘사되어 있는 이야기들은 정말이이지 상상 속의 일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것 처럼 흥미진진하고 신나는 이야기들로 가득 찬 신세계로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매 학년이 올라갈 때 마다 겨울방학이 시작될 때면 항상 새 학년 또는 새 학기에 사용할 교과서를 미리 나눠주었는데 그 교과서들을 받아 든 날은 밤새 흥미진진한 소설들을 읽을 생각에 가슴 설레였고, 그 날 밤 늦게까지 국어교과서를 모두 다 읽고 난 뒤 재미있는 소설을 발견한 날은 그 감동의 설렘의 여운이 한참 동안 지속됐었던 그 시절의 내가 있었다.

1985년 초, 중3으로 올라가던 때 받아 든 국어교과서엔 굉장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것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 '황순원'의 '소나기'였다. 실로 충격이었다. 등장인물인 여자아이가 죽었다는 부모님의 이야기를 잠자리에 드러누운 채 듣고선 소리죽여 울던 주인공의 이야기에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던지... 지금도 가슴이 멍해 온다.
중3 자습시간에 16절지에 공부한 흔적을 몇 장씩 제출해야 하는 황당한 규칙 속에서 나는 한 동안 매일 황순원의 소나기를 필사했다.

그렇게 그 시절 나의 소나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서 내리고 있다.

 



깽깽이풀은 소설 석에 등장하는 보랏빛 도라지꽃의 빛깔을 닮아 있다.




ⓒ2024. Yeremiah K. Helios / 설마 / 박가이버
@beantree_parkgy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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