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추억, 미류나무

Photography/Essay
 2026. 8. 15.  설마 

추억 속의 미류나무

 

 

 어릴 적 음악 교과서에서도 등장하던 미류나무,

어느 새 표준어가 미루나무로 지정되었다는군요.

개인적으로 미류나무가 더 정감 있어 보인다.

 

 

─────── ◇ ───────

 

 

 의성군 안계면이란 동네는 국민학교 4학년 시작할 때 전학가서 6학년까지 다녔던 동네다.

 

 학교에 들어가기 직전인 7살이 될 때까진 의성군 비안면에 살다가 국민학교에 입학 하자마자 한달쯤 됐을까? 갑자기 담임선생님의 호출에 자전거 뒤에 타고 어디를 가시는지도 모른 채 앉아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강 건너의 이웃 마을인 이두면에 이두국민학교 1-1반 앞에 도착해 있었다. 나의 첫번째 전학이었다.

 

 1-1반 앞에 내려 주신 선생님께서 돌아 가시고, 7살짜리 시골 촌뜨기 남자아이는 그렇게 홀로 남겨졌다.(비안이나 이두나 시골 촌구석인 건 똑같다.) 1-1반 권복수 담임선생님께 인계된 나는 창문으로 원숭이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는 반 아이들과 옆반인 1-2반 아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싫었는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1-1반 선생님이신 권복수 여선생님의 교실로 들어가자는 말씀에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는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버텼다. 팔을 잡아 끄는 여선생님과 대치하다 급기야 난 울기 시작했고, 반 아이들이 동물원에 구경 난 것처럼 모두 창문으로 구경하고 있는, 시선이 집중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어서인지 울고불고 난리를 쳤고, 여자 선생님 혼자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지켜 보다 못한 옆반인 1-2반 남자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거드셨지만, 더 완강해진 나를 데리고 들어가는데 실패하셨다.

 

"이 반이 싫으면 우리반으로 가자"

 

라고 하시면서 내 손을 잡아 끌었지만, 이미 벌써 돌이킬 수 없는 분위기로 만들어진 관성에 의한 버팅김은 계속 됐다.

실랑이가 계속 이어지던 어느 순간,

 

"짝!"

 

 내 귀싸대기로 날아 든 것은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남자 선생님의 커다란 손바닥이었다. 생전 처음 맞아보는(?) 귀싸대기의 경험은 정말 충격이었다. 순간 나는 순한 양으로 변했고, 순순히 교실로 끌려 들어갔다. 나는 얼굴에 벌건 손바닥자국이 남은 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실의 제일 오른쪽 앞줄 앉아서 분위기에 순응했고, 7년 인생 처음으로 사회의 쓴맛이 매우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집에 갈 때까지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날 첫 수업은 산수시간들이었는데, 0과 마이너스를 배우고 있었는데 처음 배우는 내용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의 국민학교 생활은 낯선 동네에서 낯선 아이들과 어울려 3년을 지냈다. 그때 친했던 친구 이름이 석홍이었는데 성씨가 오씨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친구들과 좀 친해지려 할 때쯤 나는 다시 이웃 마을인 안계면 안계국민학교로 전학을 갔고, 다시 나의 교우관계는 다시 초기화 된 제로베이스에서 4학년이 시작되었다.

 

하늘에 물고기가 떠다닌다.

 

 


 연립주택단지에 있던 집에서 학교까지는 거리가 1km도 걸리지 않는 거리라서 항상 걸어서 등교를 했는데, 학교에 거의 다다랐을 때 비포장도로의 양쪽 길 가에는 매우 큰 미류나무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 당시 국민학생이었던 나에게 그 나무들의 높이는 체감 상 최소 30미터는 족히 되어 보였지만, 우리가 작았을 땐 주변 사물들이 어른들 보다 2배는 더 커보인다는 걸 감안하면 어쩌면 실제로는 20미터 남짓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밑둥치는 메타세콰이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거대했던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큰 미류나무였다. 비포장도로에는 가끔 달구지를 끌고 가는 황소들과 경운기가 지나갔지만, 대부분은 버스나 택시가 지나 다녔는데, 그 때 마다 운 나쁘게 흩날리는 흙먼지들이 날리는 방향에서 걸어가던 아이들은 흙먼지가 날릴 때 마다 아이들은 잠시 눈을 감을 뿐 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학교에 거의 다 도착할 때 쯤 100미터 정도를 남겨 둔 위치의 길 오른쪽 편엔 문방구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학용품 및 온갖 뽑기들이 기다리는 천국같은 곳이었다. 용돈이 생기면 하교길에 뽑기판에 붙어 있는 1번부터 100번까지의 번호가 적힌 종이를 뽑아 거기에 적힌 상품들을 받아가는데, 대부분은 값어치 없는 상품들이었지만 아주 드물게 1등 2등 3등 상품은 만화책 같은 좋은 것이 나오기도 하는데, 등수에 뽑힌 날이면 올림픽에서 메달이라도 딴 것 마냥 신나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의 코뭍은 돈을 털어가려는 상술로 만든 도박성 상품이다 보니, 이런 상품에 노출된 어린이들이 커서도 도박에 빠지기 쉬운 어른들로 성장하는 건 아닌가 괜한 걱정이 든다. 요즘 문방구에도 이런 뽑기들이 있다면 인간적으로 아이들의 정서에 해로운 상품들이니 팔지 말자.

 

 

 

 

동네의 상징과도 같았던 그 거인들 같던 미류나무들은 중학교에 진학할 때쯤 어느 날, 밑둥만 남기고 모두 싹뚝 잘려져 사라진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길이 좁았다고 하기엔 가로폭에 버스가 교차해 지나다닐 정도면 그래도 도로의 폭이 8미터는 될텐데 굳이 왜 잘라 버렸을까? 어쩌면 조만간 읍으로 승격될지도 모른다는 헛소문이 퍼지던 이 마을에 불어오던 변화의 바람에 휩쓸려 정리 당한 건지, 거대한 나무의 목재가 탐이나 지자체와 거래되어 희생 당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그 아름드리 미류나무들은 어디로 떠났을까.

 

 

 

 

 

 

 

 

 

왼쪽 뒷편에 있는 비닐하우스만 아니면 딱 좋았을텐데, 작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올해(2026) 생겼단다.

 

 

여기 사진 속 미루나무길은 아직은 애기들에 불과하지만, 그 때의 그 추억 속 미류나무길과 왠지 닮아 있어, 그 시절 추억 속에는 살짝만 불어도 바람에 나부끼는, 미류나무들의 나뭇잎들이 두런두런 사사삭 소리가 소란스러웠던 그 길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다 보니 올해 두번이나 다녀왔다.

한번은 일부러 찾아 갔고,

두번째는, 베롱나무 유명장소를 찾아 다니다가 명재고택에서 충곡서원으로 가던 길에 오른쪽편을 바라 보다가 

어라? 여기는 거기 같은데? 라며, 갑자기 차를 길가에 세우고 보니 지난 달에 들렀던 그 미류나무길이 있는 동네였다.

이런 우연이 있나. 다른 목적으로 왔다가 우연히 들러 두번이나 오게 됐다. 거리도 가깝지도 않은 이 먼 곳을. 

 

가을에 단풍 들고 벼들이 여물어 황금들판을 이루고 있을 때 추수 전에 오면 좋을 것 같다.

 

 

 

 

 


ⓒ2026. Yeremiah K. Helios / 설마 / 박가이버
 인스타그램 @beantree_parkgyver

 

 

'Photography >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친구  (0) 2026.07.10
도깨비  (37) 2024.11.28
보랏빛 추억, 깽깽이풀  (16) 2024.11.17
산신령과의 인터뷰  (15) 2024.11.11
길냥이의 충고  (11) 2024.11.05